구담정사는 앞으로는 낙동강 구담습지가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어 배산임수와 좌청룡, 우백호의 아늑한 고택으로 넓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원래 광산 김씨 안동파((光山金氏 安東派) 가문이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 국어고전문화원 권오춘 이사장이 인수하여 새롭게 재탄생한 구담정사는 안동의 자연을 조용히 만끽할 수 있는 고택입니다.
기존 한옥 형태인 'ㅁ'자 구조를 유지해서 뜰집원형을 보존했으며, 마루와 마루를 이어 실내에서 여러 방을 옮겨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안채 앞마당과 사랑채 앞마당 사이에 꽃담을 두어 안과 밖을 나누고 정원에 소나무와 야생화 및 문경목화 정원석으로 조성하여 전통과 현대에 어울리는 멋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구담정사의 뜰집구조는 앞마당, 안채, 바깥채, 뒤뜰로 이어지며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깥채에는 접빈풍류의 공간인 정자형의 높은 마루가 있고, 안채에는 가족들의 생활 공간이었던 안방, 건너방이 있습니다. 건물들 안에 자리한 안마당은 지붕이 없는 사각형태로 안채의 채광도를 높임은 물론 공기를 순환시켜 안채 공간을 외부 자연과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 항상 자연과 호흡하고자 하는 한국 건축사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구담정사의 태조산은 태백산이다. 이 태백산으로부터 구담정사에 이르는 지맥의 흐름은 아래와 같다.
①태백산 -> ②문수봉(축서사) -> ③ 만리산 -> ④용두산(용수사) -> ⑤영지산(도산서원, 한국국학진흥원) -> ⑥천등산(봉정사) -> ⑦학가산 -> ⑧소산(안동김씨의 본거지) -> ⑨정산(가일마을) -> ⑩검무산(도청) -> ⑪구담정사
①태백산(太白山)은 한반도의 등줄기로서 백두산으로부터 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南行하다가 태백산을 기점으로 반도 중심부를 향해 소백산으로 西進한다. 소백산에서 서진하다가 속리산에서 다시 반도의 남부 한가운데를 따라 지리산까지 남행는 것이 이른바 백두대간이다. 태백산-소백산-속리산-지리산으로 둘러싸인 한반도 동남부를 영남이라 말하는데,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높이 솟은 山領이 경상남북도를 아우르는 영남의 뒤쪽 담장이라 할 수 있다. 태백산에서 발원하는 것이 영남의 생명줄인 낙동강이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원줄기 이외에 영남내륙으로 몇 개의 지맥을 뻗어내고 있다. 가장 큰 내륙지맥은 태백산-일월산-보현산-팔공산-가지산-영축산-금정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다. 또 다른 한 지맥은 태백산-옥돌봉-문수봉-만리산-영지산-천등산-학가산으로 이어져 안동으로 향하는 지맥이다. 낙동정맥과 안동지맥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는데, 영남북부의 중심인 안동은 분지이기 때문에 태백·소백과 그 수많은 지맥에서 흘러나오는 지류가 안동의 낙동강 본류에서 모여들어 낙동강의 풍부한 물줄기를 만든다. 태백산으로부터 영남북부 내륙 중심부로 뻗어나오는 안동지맥은 낙동강 본류와 그 흐름을 함께 하므로 산간내륙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산들 사이에 소규모의 작은 마을을 형성할 수 있는 자연적으로 좋은 입지라고 할 수 있다.
②태백산이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동쪽 끝에 옥돌봉(춘양의 서벽)을 넘으면 봉화읍 물야를 서쪽으로 안고 있는 문수봉(文殊峰)이 나온다. 이 문수봉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머물렀던 축서사(鷲棲寺)가 있다. 문수봉 중턱에 서향하여 자리잡은 축서사는 일몰 때 의 멋진 광경은 부석사의 일몰 광경에 버금간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은 대개 산 높은 곳에 자리잡아 높고 광대한 풍광을 굽어 볼 수 있도록 하는 특징을 가진다. 화엄의 웅대한 관점을 시각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공간적 입지선정이라 보여진다. 축서사는 최근에 불사를 크게 하여 옛 모습을 일신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문수봉의 맥이 남서쪽 봉화읍에 닿은 자락에 닭실(酉谷)이 있다.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이 세거하는 이곳은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종택에 있는 청암정과 인근 계곡에 있는 석계정사는 한국 누정 가운데서도 빼어난 곳이다.
③만리산(萬里山)은 일월산이 서향하여 웅크려 만든 명산 청량산과 낙동강을 마주하여 서 있다. 이곳에 오르면 마주보는 청량산의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동 쪽으로 만리까지 멀리 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만리산이 용두산으로 이어지는 길목 깊은 골짜기에는 태자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인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이 태자사에 있었던 탑비가 김생의 잡자비(集字碑)로 알려져 있는데 김생의 글씨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므로 현재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자사의 탑비나 청량산에는 김생굴로 불려진 곳이 있는 것을 보면, 김생은 이곳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곳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였다는 설도 있다.
④용두산(龍頭山)은 만리산에 바로 이어진 산이다. 이 산 아래에 있는 용수사(龍殊寺)는 고려 의종의 원찰로 지어졌다고 한다. 무신란 이후 귀족들이 몰락하고 무신들의 발호로 고려왕실은 큰 위기를 맞이한다. 의종은 무신들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새 인재들이 필요했다. 의종은 감여가(堪輿家;풍수가)를 시켜 인재들이 배출될 가장 좋은 땅을 찾게 하고, 그곳에 원찰을 짓게 했늗데 그것이 바로 용수사다. 용수사가 있는 용두산 동쪽 중턱에 온수가 솟아 이 마을을 따라 흘러내리는 온계가 있고, 용두산 동쪽 자락 끝에 퇴계의 생가가 있다. 퇴계도 이 용수사에 와 공부한 끝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퇴계는 고향마을의 용수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 용수사는 도산서원을 지을 때도 아낌없는 지원을 해서 오래 동안 지역 유림과 용수사의 관계는 원만했으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근대 말기 유림이 용수사를 핍박하자 용수사 스스로 폐사시켰다고 한다. 최근 고려사찰인 옛터에 웅장하게 용수사를 중건했다.
⑤영지산(靈芝山)은 낙동강에서 벗어난 용두산의 맥이 안동 쪽으로 남향하다가 다시 낙동강 쪽으로 다가가서 맺은 봉우리다. 영지산의 동쪽 낙동강 기슭에는 도산서원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은 한국국학진흥원이 자리잡고 있다. 신령스러운 정신적 기운을 가진 영지산이 정신을 탁마하는 인재육성의 도량을 자신의 터에 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량산 협곡 사이를 빠져나오면서 여러 구비로 휘도는 낙동강을 굽어보는 영지산은 낙동강 가까이 여러 마을에도 그 정기를 베풀어주는 것인지 인근의 하계마을, 의인마을, 부포마을, 외내마을(광산김씨의 군자리)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부포마을과 외내마을은 안동댐으로 수몰되어 없어졌거나 인근에 고택만을 이건해서 부분적으로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⑥낙동강에 다가가 있던 영지산의 支脈은 다시 낙동강과 떨어져 내륙 안쪽으로 이어져 천등산(天燈山)에 이른다. ‘하늘 횃불 모양의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등산은 봉정사가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이 봉정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품고 있는 산의 기운은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고 그 터에 봉황이 둥지를 틀고 머물고 있다는 뜻을 지닌 봉정사(鳳停寺)는 7세기 후반 신라의 통일 직후 화엄종사찰로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천등산의 봉정사는 불타의 최고 깨달음인 화엄사상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의 역할을 하기 위해 봉황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뜻이다. 통일 직후 통일시대를 이끌 새로운 이념으로서 화엄종은 부석사에서 시작하지만, 그 화엄종의 사회적 실천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봉정사는 화엄종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부석사가 출가수행자들을 깨우치게 하는 근본도량이라면, 봉정사는 출가수행자들이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게 하는 포교도량인 셈이다. 통일 이후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횃불이고 평화의 시대에만 나타난다는 봉황이 계속해서 머물면서 어둠에 헤매는 중생에게 길을 안내할 것이다.
태백산으로부터 안동 쪽으로 뻗어내리는 지맥은 문수봉(지혜의 보살)-용두산(용머리)-영지산(신령스런 정신)-천등산(횃불, 봉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지세의 기운이 정신적인 것과 관련되고 나아가 ‘지성적인 인재’에 연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태백에서 영남북부의 한 가운데로 내밀하게 뻗어내는 이 안동지맥은 ‘人脈’이고 ‘智脈’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안동지맥은 ‘人才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등산의 횃불 기운은 불교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천등산의 동·남·서의 세 방향으로 뻗어내는 細脈에 안동 김씨·안동 권씨·안동 장씨의 시조묘(혹은 묘단)이 있는데,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이 세 성씨는 안동을 지키는 대표적인 토착가문이다. 말하자면 안동의 토착세력 모두가 천등산 기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니, 천등산은 혈맥(세 성씨의 뿌리)으로도 정신적(봉정사가 내는 화엄종의 빛)으로도 안동을 지키는 수호자라 할 수 있다.
천등산이 학가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상산(商山)이 있는데, 양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이 마치 ‘商’자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이 상산의 아랫마을이 학봉 김성일과 그의 제자인 경당 장흥효가 산 검제마을이다. 그후 의성 김씨 학봉파와 경당 장흥효의 후손들이 세거하며 많은 인재들이 배출하였다. 이 검제마을은 안동의 역사와 더불어 함께한 ‘천년 불패의 땅’이다.
⑦학가산(鶴嘉山)은 태백산의 안동지맥이 문수봉에서 천등산까지 이어가면서 소진했던 기운을 회광반조하듯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힘차게 솟구쳐내어 마무리한 산이다. 안동사람들은 대개 이 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는 듯하지만 그 역사적 기능을 감안해보면, 안동의 주산은 천등산이다. 들판에 학(鶴)이 맵씨 있게 도사리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어서 학가산으로 부르는지 모르지만, 소백산의 물줄기인 내성천을 뒤로 하고 멀리 안동을 휘돌아 풍산들로 흘러드는 낙동강을 남으로 내려다 볼 수 있게 홀로 우뚝 솟은 산이다. 북쪽인 소백산 줄기 어디에서나 이 학가산을 남향으로 볼 수 있고, 서쪽인 예천 쪽에서도 동향으로 볼 수 있다. 학가산은 백두대간이 동남으로 감싼 평지 혹은 낮은 구릉의 한 가운데인 영주·예천·안동의 세 행정구역 경계선에서 돌출하여 솟아 있어서 낙동강 상류의 분지의 누대(樓臺)와 같다. 그런데 영주·예천·안동에서 보는 학가산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예천에서 보면 곡식더미를 쌓은 노적가리 모양이고, 영주에서 보면 학이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고개를 숙인 모습이고, 안동에서 보면 안동을 외호하는 성채 모양을 하고 있다. 크기와 높이의 측면에서 보면, 학가산이 천등산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태백산에서 문수봉을 거쳐 뻗어내려오는 흐름으로 볼 때 천등산이 학가산으로 나아간 것이므로 지세의 기운이 역류할 수 없다. 다만 천등산 기운이 직접 이어졌다고 보기보다는 옹천 부근에서 조골산을 거쳐 학가산으로 흐르는 지맥과 천등산으로 흐르는 지맥이 분기한 다음 다시 천등산 기운이 상산을 거쳐 학가산과 연결되었다고 본다. 어쨌든 용두산-영지산 지맥이 천등산을 거점으로 안동의 기운을 베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비해 학가산은 한쪽으로 천등의 기운을 외호하면서 다른 한편 소산-정산-화산(花山)과 검무산으로 흐르게 하는 안동지맥의 마지막 거점이다. 학가산에는 광흥사라는 규모가 적지 않는 고찰이 있고, 그에 속한 애련암이라는 암자가 학가산 중턱에 있었으나 근래에는 이름을 바꾸었다. 학가산이 소산으로 내리뻗는 서쪽 기슭에 중대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그 아래에 서미동은 서애 유성룡이 임란 후 낙향하여 낙동강 범람으로 물에 잠긴 하회에 들어갈 수 없어 이 곳에 머물렀다가 임종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후 청음 김상헌이 선조의 고향인 소산에 일시 은거했을 때 역시 서미동에 머물렀다고 한다.
⑧소산(素山)은 학가산의 웅크린 기운이 일단 평지로 입수했다가 다시 솟아낸 첫 번째의 봉우리이지만, 주변의 너른 풍산들 때문에 상승감이 있는 작은 산이다. 모양이 가운데가 솟은 이등변 삼각형 꼴이어서 글자모양 대로 ‘소素’자를 쓴 듯 하지만 글자의 뜻처럼 이 봉우리는 작고 아담하여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비록 작은 봉우리이지만 이 마을에 세거한 안동 김씨들의 문화·역사적 역량은 결코 작지 않다. 안동 김씨가 소산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태조-세조 연간)로 알려져 있다. 시조 김선평의 9세 후손인 三近이 소산에 정착하였고 그 아들(10世) 계권은 출가하여 세조 때 큰 역할을 한 학조대사이고 계행은 도승지를 한 보백당 김계행이다. 11세대 때 장남은 이곳을 지켰지만, 다섯 째인 永銖는 서울의 장동에 정착하여 국가적 동량인 후손을 많이 배출했다. 뒷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한 노론의 명문가문인 이른바 ‘장동 김씨’다. 전국 걸쳐 안동 김씨는 여러 곳에 살지만, 소산이야말로 안동 김씨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산에 세거한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남인으로서 퇴계학파로 행동했지만, 소산에서 갈라져 간 서울 장동의 안동 김씨는 남인과 대척관계에 있는 노론의 중심세력이었다. 그런 관계로 소산에 세거하거나 안동지역에 산 안동 김씨와 서울에 진출한 노론의 안동 김씨는 당파적으로 서로 달랐기 때문에 처신하기 곤란한 점이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노론이 완전히 득세한 시기에 노론들은 남인들의 세력권인 안동을 제압하기 위해 소산의 안동 김씨를 발판으로 삼기 위해 진남서원(남인을 진압하는 상징적 의미)을 소산에 세운 일이 있는데, 이때 이 지역 남인들이 그러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무산시켰던 사례가 있다. 안동 김씨의 본거지인 소산으로 말미암아 훗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안동인’들의 세도정치로 오해하여, 안동인들의 유교적 보수주의와 세도정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비판하고 나아가 안동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갖는다. 안동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억울할 누명이다. 200여 년에 전에 안동을 떠나 서울에 살면서 이미 서울사람이 되었고, 그것도 당파적으로 안동과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의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여 망국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본관이 안동이라는 이유로 안동사람들의 세도정치로 단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오히려 노론의 일당독점정치가 망국에 이르자 구국에 앞정선 것이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이다. 을미의병에서부터 독립투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노론에게 핍박받았던 이곳 남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나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풍산의 너른 들녘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소산은 그러한 역사의 뒤안길을 소박하게 담고 묵묵하게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
⑨정산(鼎山)은 소산에 곧바로 이어져 있는데, 두 봉우리가 산세의 흐름에 따라 같은 높이로 앞뒤로 나란히 벌어져 있어 솥가마처럼 안정되어 있다 하여 정산이라 부른 것 같다. 산정에 큰 바위가 있으나 짙은 솔숲으로 가려져 있다. 정산의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광활한 풍산의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산의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가일마을이다. 안동사람들이 소위 ‘가일 권씨’라 일컫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일부가 가일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은 권항 때부터다. 마을의 기운은 정산의 두 자락이 말발굽마냥 포근하게 감싸고 마을 앞은 풍산 평야보다 지대가 높은 탓에 농수를 확보하기 위해 연못을 두고 있다. 산세와 이 마을 전체를 감도는 기운은 외부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나름대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맑고 꼿꼿하다. 한마디로 외부세계를 관망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독립적/고립적 정의감이 이 마을의 유별한 기운이다. 따라서 스스로는 정의롭더라도 외부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실제 이 마을의 역사는 맑고 정의로운 인재가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도 많은 고통을 받았다. 가일 권씨를 명문으로 발돋음하게 한 화산 권주가 연산군에 의해 처형되고 그의 부인은 자결하였다. 그 아들 권질도 또한 유배되고 권질의 딸은 실성하게 되었다. 권질은 퇴계에게 불쌍한 딸을 후처로 보내 가족의 불행에 최선을 다해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화산 권주의 5대손 권박과 그의 조카 권선이 문과에 급제하여 다시 문명을 떨치게 됨으로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더구나 권박의 손자인 병곡 권구는 매우 현달하여 당시 영남의 종장인 갈암 이현일의 손서가 되었다. 병곡 권구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선비의 가통을 이어가는 데 손색이 없었다. 그렇지만 병곡의 8세 후손대의 권오설은 일본 유학 후 신사상연구회를 이끌면서 조선노동동맹 중앙위원이 되어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것이 이 마을에 닥쳐온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이승만정권 이래 한국정부의 반공이념이 이 마을 출신 권오설의 사회주의적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연좌제적 핍박을 가했기 때문에 이 마을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은 적지 않았다. 최근엔 권오설의 독립투쟁활동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 정의롭고 지성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유별나게 핍박받았던 가일 권씨의 역사는 어쩌면 안동지역의 한국 근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다. 정산은 오늘도 가일마을의 역사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⑩검무산(劍舞山)은 여러 이름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거물산, 검무산(劍無山), 검모산(劍帽山), 흑운산(黑雲山) 등이 그것이다. 투구모양의 바위산이 정상을 차지하여 그 기세가 원만하면서도 단단하다. 이 투구모양 때문에 장수가 칼을 놓고 투구만 놓았다고 해석하여 劍이 없는(無) 산이라 하니 그야말로 견강부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물산, 검모산, 흑운산, 검무산에 내재한 공통의 소리는 우리말의 ‘검다’에 해당한다. 검무산의 명칭 가운데 흑운산은 아예 한자말로 그 뜻을 새겨 ‘검은 구름’의 산이라 한 것을 보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검은 바위의 산’이라는 뜻의 ‘흑암산’이라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검은 바위’라 하지 않고 왜 ‘검은 구름’이라 했을까? 그것은 바위 자체가 검다는 뜻이 아니라, 바위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사뭇 ‘검은 기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검무산의 한자어 번역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놓고 다시 그 번역된 한자의 뜻에 맞도록 억지로 말을 꿰어 맞추는 해석은 옳지 않는 듯하다. 검은 기운을 내뿜는 투구모양의 단단한 산이 바로 검무산이다. 그런데 이 산의 ‘검다’는 먹빛과 같은 검다의 의미가 아니라, ‘그윽하고 깊다’는 뜻을 가진 ‘검다’, 즉 ‘검을 현玄’에 해당한다. 표면의 빛깔이 검다는 뜻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감을 나타내는 심리적 표현이다. 따라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 산을 보고 평지에 돌출한 작은 산이지만 그 기세가 당차고 단단하여 주변의 기운을 압도하면서도 그윽하게 품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한 느낌을 검지 않는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산’이라 했을 것이다. 검무산은 크기나 모양이 청와대 뒤산인 북악산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바로 ‘단단하고 그윽한 기운’이다. 북악의 기운은 맵씨 있고 밝지만 그윽하지 않다. 북악산은 화려함이 드러났지만 흠결이 감추어져 있는 명산인 반면, 검무산은 화려함이 없는 감추어진 산이지만 단단하고 그윽한 기운을 품은 산이다. 이 산이 문수봉과 학가산을 이어왔다고 해서 최근에 두 산에서 한 글자씩 차자하여 ‘문학산’이라 부르고자 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되었다고 본다. 어떤 산이든지 그 나름대로 기운과 모양을 갖추었으므로 그에 합당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수 백 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불렀던 것은 그 자체가 지울 수 없는 산의 살아 있는 역사다. 산 이름을 느닷없이 바꾸어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단단하고 그윽한 기운을 품은 검무산은 오랜 역사를 기다려 마침내 그 기운을 유감없이 발휘할 자신의 때를 만났다. 경상북도 신도청이 검무산을 주산으로 새로 건설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검무산을 안산으로 검무산 북쪽에 자리잡은 풍산 김씨의 집성촌인 오미동이 있다.
⑪구담정사는 검무산에서 서남향해서 낙동강 구담습지를 향해 다가간 낮은 구릉의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 문수봉으로부터 이어져온 안동지맥(보통 문수지맥이라 함)은 낙동강과 내성천 사이에 있는데, 이 지맥의 중간 거점 가운데 낙동강에 바짝 다가간 봉우리가 도산서원 가까이 있는 영지산이고, 내성천을 바로 뒤에 붙인 것이 학가산이다. 그런데 이 구담정사는 검무산에서 예천방향으로 서향하는 안동지맥의 흐름에서 방향을 바꾸어 낙동강으로 다가간 곳이다. 가일마을 정산(鼎山)의 만만치 않는 정기(精氣)가 하회마을의 화산(花山)을 단장했다면, 검무산은 평범한 여러 마을을 자신 앞에 펼쳐진 야산 사이 곳곳에 숨기다가 낙동강 가까이 다가가서 갈무리했던 정기를 조용히 응집한 터라고 할 수 있다. 구담정사는 조선초 광산 김씨인 김무(金務)가 구담에 정착한 것이 안동 입향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데, 구담정사는 안동에 입향한 광산 김씨 구담지파의 종택이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와룡 가구(유일재 김언기)와 외내(군자리)로 옮겨 살면서 안동지역의 명망있는 기문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담양에 본거지를 둔 광산 김씨의 한 지파인 안동의 광산 김씨들에게는 구담정사가 안동 입향의 근거지일 수 있다. 요컨대 구담정사는 검무산의 그윽하고 단단한 정기를 고요히 이어받는 곳이다.